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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런

"아저씨 저 내릴게요!!!"



아마도... 금각사 가는 길


다음역은 '도시샤 대학교'라는 안내 방송을 듣고,

(나 일어 못하는데, 식스센스가 좀 있음)

황급히 내렸다.



예정에도 없었던 대학교 탐방

아니,

윤동주 시비를 찾아보자.



도시샤 대학

들어본 것 같지 않은가?


일제 강점기 윤동주 시인과 정지용 시인의 모교이자, 그 두 시인의 시비가 모셔져 있는 곳


요즘은 영화 '동주' 덕분에도 찾아가는 이가 많을 것도 같은데.. 이 때가 2012년.... 영화가 나오기 전에 어디서 주워들은 것이 있어서ㅋ 도시샤 대학에 윤동주 시비가 있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버스에서 이곳을 지나간다는 안내를 듣자마자 내리게 되었고, 계획에도 없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윤동주, 정지용 시인의 시비에 인사를 하고 올 수 있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센치한 김에

다녀온 이야기를 이제야 적는다.





캠퍼스는 방학을 했는지 한적했다.


도시샤 대학은 한국의 시인 오상순과 윤동주, 정지용, 소설가 김말봉이 졸업한 대학이다. 이로 인해 윤동주의 사진과 정지용의 시비가 교내에 있는데, 관심이 많아져서 관광객들이 이따금 이곳을 잠깐 들러서 보고 가는 경우가 많다. 대학 주최는 아니지만 한국인 동창회 및 재일본한국문학회의 협력으로 시인의 기일(2월 16일)마다 해당 장소에서 헌화식 및 교류회 등을 연다고 한다. by. 나무위키


학생식당에서 밥을 먹어보고 싶었는데

(당연히) 문이 닫혀 있었다.



도시샤 대학은 일본의 전국구 명문대학 중 하나이고, 좁게 보면 간사이 4대 명문 사립대학으로 불리는 칸칸도리츠 중 하나라고 한다. 도련님 이미지가 강한, 신학부/문학부로 유명하다는 크리스천 대학교. 시인 윤동주 역시 크리스천이라 이 대학교를 찾아 몸을 피한 것으로 알고 있다. 

내가 간 곳은 교토시 가미교구에 있는 캠퍼스로, 카라스마선 이마데가와역을 나오면 바로 나온다. 140년이 넘는 대학의 역사를 함께한 이마데가와 캠퍼스에는 예배당, 크라크기념관 등이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고...



가지런히 놓여 있는 자전거들과 공중전화 부스 작은 캠퍼스에 클래식함이 참 잘 어울린다. 



어슬렁 어슬렁

어디 있으려나~~~



엇 뭐가 있다.


여긴가보다!!


두둥





윤동주 시인의 시비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특유의 감수성과 삶에 대한 고뇌, 독립에 대한 소망이 서려 있는 작품들로 인해 대한민국 문학사에 길이 남을만한 시인. 1917년 12월 30일에 태어나 1945년 2월 16일에 옥사... 29세의 나이에 짧은 생을 다 했던 시인.... 일제강점기의 저항(항일)시인이자 독립운동가. 윤동주가 사망한 지 6달이 지나서 일제로부터 우리나라는 독립하게 되었으니... 윤동주 시인 생전에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했다.



누군가가 참회록을 적고 갔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편의 자회상과 함께 유명한, 그리고 나의 부끄러운 마음에도 제일로 드는 시..... 

윤동주 시인이 창씨 개명하기 5일 전에 쓴 시라고 한다.



참회록
윤동주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윤동주는 1월 29일에 창씨개명계를 신고했다. 그런데 이 ‘1942년 1월 29일’이란 날짜는 반드시 그의 시 ‘참회록’이 쓰인 ‘1942년 1월 24일’이란 날짜와 연결해서 생각해야 한다고 본다. 

그가 창씨개명계를 신고한 날은 ‘참회록’을 쓴지 닷새만이다. 그래서 필자는 그 시기와 작품의 제목과 내용, 그리고 상황을 볼 때, 그가 ‘참회록을 씀으로써 자신의 감정과 각오를 일단 정리한 뒤에 연전에다 창씨개명계를 신고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즉, 일본 유학을 결정하고 그걸 위해선 자신의 손으로 창씨개명계를 신고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각오했을 때, 그 뼈아픈 욕됨으로 인해 쓰인 것이 ’참회록이라는 주장이다.

출처 : 나무위키 https://namu.wiki/w/%EC%B0%B8%ED%9A%8C%EB%A1%9D




술도 있고, 돈도 있고, 조화도 있다.


나처럼 지나가던 한국 사람들이 하나 둘씩 올려놓고 간 게 아닐까.


시비에는 유명한 가장 유명한... 서시가 적혀 있다.


서 시

윤 동 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영화 '동주'가 생각난다.


좋아하는 배우가 좋아하는 시인을 연기...

바람직한 청년, 강하늘이 윤동주역을,

송몽규 역의 박정민도 참 좋아라하는 배우다.



영화 동주도 다시 봐야지



일본 대학이 일제 강점기의 한국 학생을 위해 이렇게 교내에 시비를 만들어서 그를 기리고 있다는 게 아니러니하고 참 신기했다. 지금은 한편으로 고맙기까지 했다.


물론 그들의 선조들은 잘못을 했지만, 1995년 그의 후배들이 발의를 하여 시비를 건립했다고 하니... 어찌 고맙지 않겠나



살아 생전에는 얼마나 고독했을까 생각하니..

시비 역시 쓸쓸해보인다.



바로 옆 정지용 시인의 시비도 있었다.


정지용 시인은 윤동주 시인과 함께 작업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처음 서문을 작업한 시인으로 알고 있다. 이곳 도시샤 대학에도 바로 옆에 시비가 붙어 있고, 나중에는 윤동주 시인의 유고시집 초판 작업으로 인연이 되었지만, 둘은 생전에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정지용 시인이 15살 위로, 정지용은 1923년 도시샤대학 영문과에 입학, 윤동주는 1942년에 왔다고.... 




유년시절 윤동주 시인의 책꽂이에는 정지용 시인의 시집에 꽂혀 있었다고 한다. 

유고 시집에서라도 좋아하는 시인이 서문을 적어줬으니... 윤동주 시인은 그래도 좋았을 것 같다.



정지용 시인 시비에는 교토에 대한 시

[압천]이 쓰여져 있다.


정지용 시인의 시로는, 우리가 가장 많이 듣고 불러 알고 있는 시 '향수'가 있는데, 이는 일본 생활 중 고향땅을 그리워하며 지은 시라고 한다. 



향 수

정 지 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傳說)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


언제 교토에 가시는 분들은 

모쪼록 많이들 찾아가셔서

윤동주 정지용, 두 시인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 가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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